주디스 버틀러가 그랬지. 우리는 사랑하는 순간 서로에 의해 훼손된다고. 사랑은 자신의 훼손을 무릅쓰고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인데 무해할 수가 있나. 그저 서로의 연약함과 죄성을 인정하고 함께 돌아보는 수밖에.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만에 가깝다.
오늘 김초엽과 정세랑 SF 수업을 했는데 , (아주 교과서적인 내용만 얘기했는데도)수업 마치고 한 여학생이 와서 이런 귀띔을 해주었다. "이런 내용 강의하시면 다음 날 에타에 '저 교수 페미다' 이렇게 올라와요."하고. 대체 요즘 대학 사회는 어떻게 되어가는 걸까? 에타란 데는 뭐하는 곳일까? 이
이번에 일어난 가슴아픈 사고를 바라보며 사람들이 캠퍼스가 얼마나 여학생에게 위험요소가 많은 공간인지 깨달았으면 좋겠다. 학교에는 아직 총여학생회가 필요하고 여학생 전용 휴게실이 있어야 한다. 세상이 바뀌었지만 위험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알려지지 않은 일들은 얼마나 더 많겠는가.
웹툰 산업 현황을 보면 로맨스판타지의 제작 유통, 그리고 매출이 타 장르에 비해 압도적이다. 그런데 웹툰 담론은 주로 액션 같은 남성향 장르를 중심으로 주로 형성되어 있다. 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책(웹툰을 책으로 만든 것) 가운데 로판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에 순정만화가 주로 여성이
판교 문학, 중산층 문학 있을 수 있다.제인 오스틴, 존 치버 소설 보소 다 중산층 이상이고 그 계급의 일상을 다루다가 그 화려해 보이는 일상에 숨어있는 인간사의 치명적인 진실에 접근하지, 심지어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도... 문제는 '치명적인 진실'에 있다. 여기에 못 접근하니까 문제...
확실히 문예지의 위상이 떨어지고역량있는 비평가들이 학교에 자리를 잡으면서 예전 같으면 평론으로 여겨졌을 괜찮은 글들이 논문으로 실리는 걸 본다. 금방 출간된 작품들을 다루는. 이건 오히려 잘 된 현상이라고 본다. 동시대 텍스트를 다룬 글도 학계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야한다.
넷플릭스 다큐 <씨스피라시>를 보았다. 인간이 지구에 저지르고 있는 짓이 너무 잔혹하고 파괴적이어서 말문이 막힌다. 특히 돈을 쫓는 기업들. 기업형 어업이 바다의 씨를 말리고 기후위기를 초래하고 식탁을 위협해도 제제할 방법이 없다. 즐겨먹던 연어의 선홍색이 모두 인위적인 것이란 것도 충격.
한스 하케(Hans Haacke 1936~)의 설치미술을 좋아한다. 예술 제도 비판 없이 정치적 예술을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문단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
표절과 성폭력을 비호하는 출판 에콜(신자유주의 시장에 잘 안착한)에 대한 비판 의식 없이 글 쓰는 작가를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을 둘러싸고
인류세, 제로 웨이스트, 비건, 녹색 이런 단어들이 남용되는 것, 심지어는 마케팅으로 이용되는 것(그린워싱)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이번 학기 학생들과도 토론을 했다. 이런 개념의 남용이 진짜 현실을 보지못하게 하는 알리바이 역할을 한다고 하는 학생도, 이렇게라도 얘기해서 주의를
오늘 학생이 수업 시간에 마크 그래노베터 (Mark Granovetter)의 약한 연결(Weak ties) 개념으로 장류진의 소설을 분석하는 발표를 했다. 현대 사회는 약한 연결로 맺어진 사람들이 오히려 삶에 큰영향을 미친다고. 매우 적절한 분석이었다고 공감하며 저의 트위터 생활을 고백했다...
로맨스의 압도적 인기는 연애와 결혼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욕망의 정치가 그만큼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 또한 문화 영역에서 여성 구매력이 차지하는 힘을 보여주기도. 현재 한국사회를 가로지르는 특수한 사회문화적 상황이 세계적인 보편성에 호소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
학생들과 상담할 때 저는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뭔데?"란 질문을 꼭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응시하게(혹은 대면하게) 해주는 것만으로 많은 것이 풀리더라고요. 본인이 원하는 것도 이랬던 것 같아요. 혼자서는 안 되고 선생님 앞에서 증명받고 싶은. 답은 이미 자신이 갖고 있더라고요.
오정희 작가의 만년은 박완서 '선생'의만년과 많이 대비된다. 작품은 오 작가가 훨씬 낫다고 보지만. 박 샘은 말년까지 성실하게 작품활동을 하시면서 후배 작가들을 아껴주셨다. 물론 후기 작품들은 힘이 많이 떨어졌다는 평을 받지만. 작품 활동 거의 없이 동인문학상 등 문단의 권위있는 자리는
<2050 거주불능 지구>를 읽고 있다. 가려져 있던 진실이 너무도 많다. 인류의 화석연료 사용의 절반 이상은 1989년 이후에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 아니 불과 십여년 전의 하늘, 기후와 비교해보면 매우 다르다. 이 변화 속도는 가속기를 단 것처럼 점점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
아빠의 삼우제를 마치고 방금 귀가했습니다. 밤에 혼자 식장에 앉아서 무심코 쓴 트윗에 많은 분들이 조문의 말씀을 주셨어요. 눈물을 흘리며 가족들과 함께 읽었습니다. 정말...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말 없이 함께 해주신 분들께, 따스한 트위터에 삼가 맞절 드립니다.
또 졸업한 학생한테 메일이 왔네. 이 학생은 미대생인데 소설을 참 잘 썼다. 네 소설에서 배수아 느낌이 난다고 했더니 처음 들어 봤단다. 그 때부터 읽기 시작해서 배수아로 학위논문까지 썼다고. 지금은 문학으로 갈까 미술로 갈까 고민중이라고 한다. 무지한 스승한테 학생이 알아서 잘 취해 간 듯.
판교 노동자도 미생의 대기업 노동자도 후기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 엄존하는 계급적 모순... 같은 치명적 진실에는 못 접근할 지 몰라도 구조의 틀에 끼여 몸부림치는 개인의 진실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세태를 날카롭게 응시한다는 점에서는 괜찮다 다만 달까지 가자 같은 판타지
문학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서 늦은 밤시간, 지하철 역과도 떨어진 은평구에 양재에서, 강남에서, 수지에서 오신 분도 계시다. 이제 인문학이 위기라는 말은 안 하련다. 시선의 위치를 바꾸니 전혀 다르게 보인다. 필요로 하는 사람 입장에서, 이 요청에 어떻게 응답할까 하는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티모시 모튼은 '초과물(hyperobject)'란 단어를 만들었다. 걱정해야 할 대상이 너무 커서 인식범위를 벗어나면 자기 일 같이 생각 안 한다는 것이다. 기후위기가 대표적이다.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문제인데도. 그 초과물은 문학에서도 잘 재현이 안 된다. 문학의 재현망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사실 세간에 모든 케이스가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지 소설가들은 사실을 변조시켜 자신들의 취지에 맞게 활용하는 데 선수다. 분명히 피해자들은 있다. 그들이 몰랐거나 알았어도 픽션에 대고 일일이 반응하지 않을 뿐. 그것은 픽션 작가들의 (미약하지만 그래도 그것이나마 ...) 권력이기도 했다.
강남구립 정다운 도서관에서 여름 특강 열어요!
6/8(목) 시작이고요, 지원 사업이라서 전액 무료입니다. 12차시 3시간이나 진행되는 수업이라 깊이 있게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무려 오전 9:30 시작이어서... 자리가 많이 남았습니다. 여름 내내 문학 속에 푹 빠지고 싶은 문들은 언제든 오세요.
다른 업계에서 일하시던 분들이 문학계로 와서 상처받는 경우가 많아요. 그도 그럴 것이 이쪽은 ... 다른 업계에 비해서 처우라든지, 공정성이라든지 그런 게 솔직히 말도 안 되어요. 저 역시 바깥에 있다 돌아온 케이스지만 이제 이쪽에 완전 귀순했어요. '좋아서' 한다는 게 최종, 유일의 답변이지요
환기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오히려 지나친 경계가 개인의 작은 실천을 평가절하해서 기후허무주의를 유발한다는 의견도. 한 학기 내내 계속되는 논쟁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는 어떻게든 더 표면으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토론이라도 되어야. 한국은 탄소배출량 세계 7위의 기후악당인데
기호학 전공 교수님은 기호학으로 우주를 다 설명할 수 있다고 하셨고 서사학에선 서사가 모든 인지 능력의 기본이라고 하고 언어학 수업에서는 언어가 근원이라고 했고 컴공 학부생인 아들은 우주가 0과 1로 이루어졌다는정보우주론에한동안 빠져 있었다. 이런 관점들이 모두 재미있다.
오늘 뵌 선생님은 페미니즘이 싫다고 했다. 내가 볼 땐 인생이(그리고 수업 내용 전부가) 페미니즘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유는 페미니즘을 내세우면서 전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학내 권력의 수단으로 내세우는 사람한테 너무 치어서라고 말씀하셨다.
내부의 반성이 필요한 지점이다.
오늘 저녁에는 도서관에서 김영하의 <<검은 꽃>>으로 강의하는 날. 멕시코 민속음악을 브금으로 띄우고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다. 이번에 절실하게 느낀 것은 김영하의 한계. 이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적극 부인하는 것과는 별개로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에 마초. 텍스트가 드러내는 진실은 피할 수 없다
문학에서 도덕, 윤리를 기대하면 안 된다. 이 두 가지가 안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도덕은 도덕에게, 윤리는 윤리에게 기대하고
문학에겐 문학을 기대하면 됨.
왠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가 생각난다.
(일단 문학이라는 전제 하에서 다른 것들은 논할 수는 있다...당연히.)
웹소설 계는 참 특이한 것이 '자기 것' 개념이 좀 다른 것 같다. "이건 내 아이디어인데 네가 갖고 가서 쓰니 표절이야" 이런 것이 없는 걸까? 인물들 이름도, 소재도, 모티프도 두루두루 공공재처럼 쓰고 그러면서 또 세계관을 아기자기 확장해나간다. 그런 걸 '놀이'처럼 즐긴다.
요즘 수업하면서 절망을 느끼는 순간은 청년 특히 남학생들이 혐오를 드러낼 때다. 현장에서 그걸 느끼냐고 묻는다면 정말 많이 느끼고 나는 그걸 일일이 지적한다. 아마도 그들은 불만을 느끼고 많은 경우 강의평가에 반영할 것이다. 나는 세심하게 적응해서 수업 때 잘 조절하려고 애쓰는데 그걸 경
논문 쓰기 대학원 특강 준비 자료 만들다 자괴감이 든다. "학문적인 양심의 기준은 모든 자료의 출처를 밝히기를 요구한다. 그것은 다만 정직성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학문을 인정받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용된 모든 사실이나 의견 또는 결론에 관한 전거나 출처는 축자적으로 또는
실제 작가의 삶이 작품 내용과 배치될 때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람이 완벽할 수도 없고 무결점일 수도 없지만... 방향성 즉 지향점이 다르면 실제 작가의 삶도(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충분히 곁텍스트(paratext)가 되어 작품 해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론 쓰고 번역하면 학계에서 이상한 사람 취급했던(지금도 여전히...) 시절도 곧 지나가겠지. 국문학계는 정말 답답하기 그지 없죠. 해외에는 번역서 갖고 박사학위 받은 석학도 있는데 ... 그리고 평론가는 국내작품만 다루어야 하는 이상한 불문율도 있고 말이죠. 오히려 논문은 그렇지 않네요.
도서관 수업이다보니 수강생분들 가운데 빌런이 계시는 경우를 대처하는 것이 숙제다. 어제 밤엔 역시 광주와 베트남 전쟁의 산이 (아직도) 높음을 실감했다. "트라우마는 정신병인데 왜 자꾸 기억하라고 하느냐" "광주는 이미 청산됐다" 는 등 극우적 성향 발언을 반복하는 분이 계셔서 애를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