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에 관한] 오해 중 하나는 이거예요.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아주 흔하다고도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내가 말하려던 바는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너는 낯선 도시에서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것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여행을 했다. 너는 배우가 아닌 관중이었다. 움직이는 여행자, 조용한 관객, 우발적인 관광객. 너는 공공장소, 광장, 길과 공원을 무작위로 방문했다. 상점, 식당, 교회와 박물관에 들어갔다. 너는 도시의 흐름 한가운데 가만히 서서
“한국 사회에서 난민의 얼굴은 2018년 제주에 도착한 예멘 난민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 그때 무엇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바로 난민의 겉모습이다. 한국에 도착한 난민을 찍은 미디어의 사진에 가장 많이 달린 댓글들은 가장 먼저 이들의 ‘난민답지 않은’ 옷차림과 ‘난민답지
“예술은 실제로 발생하는 것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일어나기를 바라는 무언가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바꿀 수는 있다. (...) 예술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지만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 예술은 적을 죽일 수 없지만 상징적 폭력과 미학적 테러를 가할 수 있다.”
“글쓰기는 붙들린 영혼을 구하고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끼는 사람을 구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를 구하는데, 이것은 글을 쓰지 않는다면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글쓰기는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고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을 재현하는 일이며 단지 모호하고 답답하게 남아 있는 감정들을 깊이 느껴보는
“사랑은, 좀 더 많은 관련이 허락되는 일이다.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한 거대한 환멸이기 때문이다. 환상의 상실을 견뎌낼 사람은 거의 없다. 반면에 사랑이 삶을 풍요롭게 해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자발적으로 사랑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신인종주의란 피부색이 아닌 ‘문화적 차이’를 내세우면서 추방과 배제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무슬림은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로 종교적 범주다. 이들은 북미•유럽•아시아•아프리카 등에 사는 인종을 초월한 종교집단이지만, 마치 하나의 인종처럼 구분되기 시작했다. 신인종주의는 무슬림의 종교,
“영화에 관해 간과하는, 그러나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실 중 하나는 영화가 자연적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는 인위적 이미지이며, 영화적 지각은 현실의 지각과 동일하지 않다. 영화의 지각 대상들이 현실과 유사하고 현실적 대상처럼 인지된다 해도, 영화적 지각의 연속감이나
“전쟁 첫날, 친구가 문자를 했다. “가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나는 답신했다.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라 여태껏, 75년이 넘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냐고 묻는 게 제대로된 질문이야.” (...) 이 도시에 미래가 있다면 어떤 미래를 마주할지까지 생각이 미치자, 계속
“1945년 8월 15일은 일본인에게는 패전의 날이고 조선인이나 타이완인에게는 해방의 날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일본과 분리되어 조선인이나 타이완인이 원래의 고향(조국)으로 귀환하는 전혀 새로운 사태이자 피식민지 서사를 지워내고 새로운 민족 서사를 쓰는 일이기도 했다. 반면 일본인은 스스로를
“히치콕 같은 감독이 극 중 인물 중 누군가의 시점 숏만으로 카메라의 시야를 제한할 때는 우리 시각의 한계가 우리의 한계라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그 한계는 극 중 인물의 한계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숨겨진 정보는 우리 아닌 다른 누군가의 앎의 구멍일 뿐이며, 우리에게 그 정보가 어떤 시점까지
“그리스인들은 우정의 대화에서 실현되는 인간성을 필란트로피아(philanthropia), 즉 ‘인간애’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애는 다른 사람들과 세계를 공유하려는 마음가짐 자체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애의 반대 개념인 인간 혐오는 인간을 혐오하는 사람이 그와 함께 세계를 공유할 사람을 찾지
“사랑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면 그 틈새로 밤이 스며든다. 밤은 끝없이 이어진다. 분한 마음과 비난으로 들끓는다. 밤새 이어지는 괴로운 내면의 독백은 해가 떠도 잦아들지 않는다. 나로선 이 점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이토록 ‘그이’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이렇게까지 그 사람에게
않은’ 겉모습을 지적하고 있었다. 난민이 왜 비싼 에어팟을 끼고 있냐고 묻고, 신발이 너무 깨끗하고 양복을 입고 있는 점이 이상하다고 하며, 전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할 난민”이 아닌 표정을 짓고 있다고 ��아해했다. 그동안 주로 참상의 현장에서 보도사진으로 찍힌 난민의 이미지를
“언어를 체계적으로 약탈하는 사용자의 경우, 위협과 진압을 위해 언어의 미묘하고 복잡하고 산파적인 특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억압적인 언어는 폭력을 반영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폭력 그 자체입니다. 지식의 한계를 반영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지식을 제한합니다. 명료하지
“글쓰기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너무도 자주 기억하는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 것일까? 그러니까 내 기억처럼. 기억의 노력으로, 마치 내가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나는 한 번도 살았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그 기억은 생생하다.”
“나는 삶에게 극히 사소한 것만을 간청했다. 그런데 그 극히 사소한 소망들도 삶은 들어주지 않았다. 한 줄기의 햇살, 전원에서의 한순간, 아주 약간의 평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빵, 존재의 인식이 나에게 지나치게 짐이 되지 않기를,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그리고 타인들도
2009년에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절판된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이 같은 출판사에서 올여름 재출간 예정이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사실인가. 꼭 재출간되길 바라고 오래전에 빌려읽은 이 책을 이번에는 소장해서 다시 읽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나는 무엇에 대해서든 지나치게 착실해져버리니, 그래서 지치는 것이리라. 조금이라도 주장이 있으면 남의 이야기든 음악이든, 흘려듣는 게 불가능하다. 언제나 지나치게 마음을 쏟는다. 그런 나머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자신에게 그 능력이 없다는 자기 처벌적인 피로감에
“장례식이나 그 절차가 어떻게 될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런데 만약 여자와 남자의 구별이라도 있다면, 나는 후자를 원합니다. 내가 태어나는 것을 고르지 못했으니 죽는 방식은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습더라도 그렇게 해주세요. 유언 집행자인 내 친구 B가 그렇게 잘 도와줄
“Água Viva는 단어 그대로를 직역하면 ‘살아 있는 물’로 번역되고, 일반적으로는 해파리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의미에는 공통점이 있다. 뼈대가 없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물’은 뼈대 즉 특정한 형태를 강제하는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이며, 그 살아 있는 물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쉽다. 이제 우리는 이 말을 수정하여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상상하자.” 렘 콜하스•프레드릭 제임슨 [정크스페이스l미래 도시](임경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0)의 [미래 도시]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
“If it is so, as someone has observed, that it is easier to imagine the end of the world than the end of capitalism...”
“활동가들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의 절규와 땅, 물, 공기의 절규를 “삶의 열망”으로 한데 묶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인간 빈자와 비인간 빈자의 공통성을 생각했을까? 특별히 물어본 적은 없지만, 나는 이따금 서울역 맞은편 동자동 쪽방촌에 들러 활동가들이 주민들과 동거하는 방식을 보면서 새삼
인류학자 이승철의 논문 [모든 것의 자산화: 토큰화, 미시자산, 그리고 새로운 자산 논리](뉴 래디컬 리뷰, [뉴 래디컬 리뷰], 2023). 한국의 사례들인 ‘뮤직 카우’•‘신세계 푸빌라 NFT’•‘플레이투크리에이트Play to Create, P2C’를 매개로, 노동과 생산과정을 직접 경유하지 않는 방식으로 축적을
“내게 희망이란 낙관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낙관주의는 비관주의와 마찬가지로 미래가 예측 가능하고 개입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다. 내게 희망이란 미래의 인지 불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며, 미래에 나타날 결과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그 결과에 개입할 수도
“‘인간에 관한 이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런 상황에 있다면 그런 행위를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이해’, 또한 그런 상황에서 한 그 행동에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해’의 집합이다. 이 이론은 폭주하여 상호 모순되는 다수 의 가설을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이론은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나는 내가 누군가를 꾸짖으면 그들이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그래서 전혀 흔하지 않은 말을 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상상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나는 “너무 평범해(banal. ‘진부하다’라는 뜻도 있다)” 하고 말해요. 아니면
“‘아이히만은 자신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갈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고 ��각했던 것’이라고 주장할 때 아렌트는 옳았다. 그녀의 생각에 동거는 선택이 아닌 우리 정치적 삶의 조건이다. 우리는 계약에 앞서, 모든 의지적 행위에 앞서 서로에게 묶여 있다. 우리 각자가 앎과 의지로써 계약을 맺는다고
“1980년 4월에, 즉 광주의 학살이 일어나기 직전에 출간된 문학과 유토피아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김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제야말로 문학비평가가 정말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생각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반체제가 상당수의 지식인들의 목표이었을 때, 문학비평이
“헨리 제임스는 내러티브가 드라마적 원칙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했으나, 단일한 행위의 통일성보다는 단일한 의식consciousness의 통일성을 추구했다. 제임스에게 내러티브에 적합한 통일성은 있었던 사건의 통일성이 아니라 지각의 통일성, 있었던 사건에 대한 의식의 통일성, 있었던
“학부 때였나? 수업 시간에 한 교수가 사랑의 비효율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다. 사랑에 목을 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고, 대학생이 조심해야하는 일이라고. 나는 그 교수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목맬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건 복된 일이다. 사랑이 끝난다고 해서 그 복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신자유주의 내전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이 전쟁은 과두 정치 세력이 앞장서 벌이는 ‘총력전’이다. 이 전쟁은 사회적 권리 축소를 노린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며, 외국인에게서 모든 종류의 시민권을 박탈하고자 하고 망명권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민족적이며, 모든 저항과 비판을 억압하고
‘난민다운’ 모습이라고 인지하고 있던 이들에게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옷을 입거나 더 잘 입은 사람들의 모습은 ‘가짜’ 난민이라는 의심이 들게 했으며 이것은 점차 난민 반대 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몇몇 사람들만의 오해나 해프닝으로 그칠 것 같은 무지한 의심 같아
“흔히 민주주의라고 쓰는 (...) 이 단어는 흔히 인민으로 번역되는 데모스dēmos와 통치로 번역되는 크라토스kratos가 결합하여 만들어졌다. 이 어원을 따르자면 인민이 통치하는 것이 데모크라티아, 즉 민주정•민주주의인 것이다. 이 단어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정에서 인민이 하는 일이 투표가 아니라
“니콜 브르네즈: [잔 딜만]의 개봉 후 어떠셨나요?
샹탈 아케르만: 칸영화제에서 상영이 끝난 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건 마르그리트 뒤라스였어요. 그는 곧바로 영화를 폄하하려고 들었고요. 그는 자기라면 살인 장면을 넣지 않을 거고, 한 인물의 전기를 만들었을 거라고 했죠. 나는 그가
“2차대전은 묘하게도 그 전쟁을 겪었던 세대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 중요성이 줄어들기는커녕 공적公的인 이미지 속에서는 오히려 더 커졌다. 지난 15년 동안 2차대전에 대한 영화, 다큐멘터리, 전시회, 책이 가장 많이 범람한 나라는 독일이다. 그러나 학문적 연구와 대중적 의식 모두에서 전쟁에
역사학자 김학이가 번역한 제3제국 시기 역사책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소장해야할 책일 텐데,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독일인의 전쟁 1939-1945: 편지와 일기에 담긴 2차대전, 전쟁범죄와 폭격, 그리고 내면](교유서가, 2024)은 윌리엄 M. 레디 [감정의 항해: 감정 이론,
“어느 날인가 베케트는 무대 위에 메트로놈을 올려놓기도 한다. [오 행복한 날들]을 연습하는 영국 여배우가 문장의 속도를 제대로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배우가 텍스트를 음악적으로 연기해내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엄밀한
“여운형은 도쿄에서 일본군의 전투기가 미군기를 요격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미국의 군사적 우위와 최종적 승리를 직감했다. 귀국 후 홍증식 등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고, 소문이 퍼져나가 1942년 12월 일본군 헌병대에 검거되었다. 1943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여운형은 옥중에서 일본의
“만약 우리가 글을 쓰고 싶다면 그건 절망에 빠져 있기 때문이죠. 만약 우리 스스로 중요한 모순을 잊어버린다면, 또 끊임없이 이 모순 속에서 살지 않는다면 결코 작가가 될 수 없어요. 한낱 이야기꾼은 될 수 있을 겁니다. 모순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어요. 안이함에서 오는 역겨움만 있을 뿐이지요.”
“입센과 체호프의 드라마에서는 대체로 도시에서 양육된 자유와 계몽의 개념이 시골로 흘러 들어가, 시골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질서의 목이 뻣뻣한 관습과 싸우는 데 몰두한다. 그러나 그 질서는 특히 체호프의 경우에는, “벚나무 동산”이 같은 제목을 가진 희곡에서 토지를 가진 지주의
조문영의 [빈곤 과정: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글항아리, 2022)과 제니퍼 M. 실바의 [커밍 업 쇼트: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문현아•박준규 옮김, 리시올, 2020). 그러니까 도서관 희망도서로 들어온 조문영의 책을 읽으려 하면서, [빈곤 과정]과 완전히 같은
“별로 안 좋아” 하고 말하거나요. 그게 내가 말하려던 뜻이에요. 평범성(banality)은 정말로 간과할 수 없는 현상이었어요. 그 현상은 우리가 듣고 또 들었던, 솔직하게 말해서 믿기 힘든 클리셰와 표현 방식들에서 저절로 모습을 드러냈어요. (...)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인류학자들은 근대 서구 사회의 사람들이 세대와 시간,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선형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관습적으로 주장한다.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것을 지나치게 확신한 나머지, 비서구인의 삶에서 선형성을 찾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기껏해야 가벼운 자민족중심주의로
“시대착오, 시간착오로 해석되곤 하는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e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뒤로, 역방향으로’ 등을 의미하는 ana-와 ‘때, 시간’을 의미하는 chronisme이 결합된 말이다. 말 그대로 방향, 결을 거스르는 시간의 운동이다. 여기서 ‘방향’이란 우리의 경험적 지각과 앎을 계기화하고
인류학자 조문영의 [행위자-네트워크-이론과 비판인류학의 대화: ‘사회’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비교문화연구], 2021). 중국과 한국을 현장으로 빈곤에 관한 연구를 긴 시간 수행해온 인류학자이자 [빈곤 과정: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글항아리, 2022)과
“인용은 ‘무로부터의 창조’나 예술적 천재의 독창성 같은 고전적 창조 원칙에서 벗어나 ‘이미 있는 것들의 재활용’이라는 현대적 창조 개념에 부합하는 고다르식 몽타주 기법의 하나이다. 고다르는 “나는 언제나 인용 방식을 활용했다. 다시 말해 나는 한 번도 뭔가를 새롭게 발명한 적이 없다. 책을
“오늘날 자본축적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신채굴주의neo-extractivism’를 제안하는 산드로 메차드라와 브렛 닐슨에 따르면, 고전적 의미에서 ‘채굴’은 “지구의 표층, 심층, 생물권으로부터 자원과 생명 형태를 강제적으로 뽑아내는 행위”로, “자본이 그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외부들과 맺는
“제가 데모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데모로 혁명을 일으키라거나 데모로 사회를 바꾸자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데모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겁니다. 데모의 존재는 그 나라가 전제국가가 아니라 민주적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다시 한 번, 데모란 무엇인가에
“재즈는 늘 어느 정도 미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대변해 왔다. 그것은 민주적이었다. 각각의 연주자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를 개발할 수 있었고 그것을 앙상블에서 녹여 냈다. 이것은 미국이라는 정치적 통일체의 매디슨주의적인 역동적 긴장을 반영한다. 이곳에서 단련된 한 개인은 민주적 사회를
보이지만 낯선 이방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은 그러한 물음들을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바꿔갔다. “가짜 난민 OUT”, “국민이 먼저다.” 점차 사람들은 난민이라면 응당 정치적인 박해나 자연 재해와 같은 생사의 문제가 걸린 상황으로 인해 한국에 도달했으나 그것이 경제적인 목적은 배제한 ‘순수한’
“중세 지식 문화의 근본 특징 중 하나는 라틴어가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서구 모든 나라에서 라틴어가 하나 혹은 여러 현지어langues vernaculaires와 공존했음을 근거로 중세 문명이 이중 언어 문명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그렇지만 중세의 “이중 언어 상황bilinguisme”,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
“If it is so, as someone has observed, that it is easier to imagine the end of the world than the end of capitalism...”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이재만 옮김, 책과함께, 2019)와 [강철왕국 프로이센](박병화 옮김, 마티, 2020)을 무척 재밌게 읽었기에 책과함께 출판사에서 출간예정인 같은 저자의 [Revolutionary Spring: Fighting for a New World 1848-1849]
《몽유병자들》을 읽으며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통찰력에 감탄한 분이 많으실 텐데요.
그가 19세기 중반 유럽 전역에서 일었던 혁명의 물결에 초점을 맞춘 신작 《Revolutionary Spring: Fighting for a New World 1848-1849》가 4월에 출간된답니다.
저희가 그 한국어판 계약을 확정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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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여러 함의를 갖는다. 그중 하나는 서로 다른 가치관이 충돌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충돌하게 될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런 충돌이 인간 공동체의 징표라는 점이다. 또한 이런 갈등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우리가 인간임의 징표이며, 중요하게는 형성 과정
“왜 ‘전후’는 끝나지 않는 것일까? 미국의 역사가 캐롤 글럭(Carol Gluck)은 어느 나라든지 간에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로 불리는 시대는 1950년대 후반까지 끝나고, 그 뒤의 시대는 ‘현대’로 취급됨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아직 ‘긴 전후’가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 그 이유의 하나로서
“낭만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좋은 취향이라는 개념은 천재 개념에 의해 억압되는데 이는 공통의 장소 개념에 큰 영향을 준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공통의 장소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이 변화의 결과 중 하나는 문화적 일치에 대한 근대적 위기, 인간 공동체와 공통���에 대한
전후 일본 영화를 생각할 때 나란히 놓고 살펴보는 영화에 오즈 야스지로의 [꽁치의 맛秋刀魚の味](1962)과 나루세 미키오의 [흐트러지다乱れる](1964)가 있다. [꽁치의 맛]과 [흐트러지다]를 생각하면 항상 두 영화의 (역사적인 엔딩이라고 까지 말하고 싶어지는)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고, 그 장면에
“1957년 5월, 소련 당국의 공식 초청을 받은 스물네 살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각각 네 차례씩 공연을 가짐으로써 서방 음악가로서 소련을 방문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굴드의 바흐 연주는 일대 선풍을 불러일으켜 곧 그에게 신화적인 위치를
이미지란 과연 무엇인가? 외양과 특정 기호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정체성인가? 난민은 옷차림으로 자신이 난민답다는 것을 표현해야만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계속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누구에게 심리적 안도감을 주는가? 무엇보다 겉모습 만으로 그 사람에 대해
“소설이라는 프로젝트가 굳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생하는 식이 될 필요는 없다. 픽션ㅡ소설뿐 아니라 서사시와 신화까지 포괄한다ㅡ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가정법으로 세상에 접근하는 것, 세상을 마치 그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인 양(as if) 그려내는 노력이다. 다시 말해, 대체할 수 없는 픽션의
“하나의 형식으로서 소설은 겉보기에 불가사의한 것의 본고장인 것 같다. 어쨌거나 위대한 소설가 가운데 일부는 줄곧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써오지 않았는가? 이 대목에서는 곧바로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헨리 제임스(Henry James), 그리고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사진이란 과거의 어느 순간 카메라 앞에 있었던 무언가의 흔적인 ‘동시에’ 그것의 생김새를 닮은 형상이고, 증거인 ‘동시에’ 유사-현존이며, 물질인 ‘동시에’ 이미지라는 것을 종종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비유하자면, 주형과 모형이 한데 붙은 것이 사진이라고 보는
“사이드: 자기 관심과 취향을 발견해내는 건 시간이 꽤 걸리는 일입니다. 저는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는 다성성polyphony이라는 현상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음악적으로는 대위법적인 작품, 형식에 많이 끌렸습니다. 미학적으로 화음부터 불협화음까지 포괄하고, 계획된 전체 안에 다양한 목소리의 공존이
사정이어야 하고, 종교적으로 위험하지 않거나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깨끗하며’, 한국말과 한국 문화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범 시민과도 같은 사람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기대에 어긋나는 이미지들은 난민이 맞는지를 판별하는 시험대에 오르며 난민 반대 운동과
“우리는 항상 다른 곳에서 산다 (...) 우리는 아무것에도 정들면 안 된다. 나는 그 어디라도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는 데 익숙하다. 그러려면, 내 푸른 수건을 의자에 펼쳐 놓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바다다. 내 침대 곁에는 항상 바다가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나는 바로 헤엄칠 수 있다.
“악마와의 계약: (...) 1. 절대로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는다, 인류에게 선을 행하기 위한 목적으로부터. 2. 절대로 쓰지 않는다, 선정적인 것들이나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 악한 것, 읽는 이를 해치거나 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3. 절대로 잊지 않는다, 진리의 이름으로 종교를 공격할 때,
“시초에 공포가 있었다. 마르틴 루터를 근대 독일의 시작점으로 간주하는 한 그렇다. 루터의 저술 중에서 당대부터 현재까지 루터파 교회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학습되는 팸플릿은 루터가 1529년에 작성한 [소교리 문답]이다. 루터는 십계명의 조항 하나하나를 간결하게 해설한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일본’에 있어서 ‘오키나와’란 무엇인가, ‘오키나와’에 있어 ‘일본’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다음과 같은 입장으로 나뉜다. 즉, ‘오키나와’와 ‘일본’을 별개의 ‘주체’로 간주하고, ‘오키나와’의 ‘일본’에 대한 입장을 밝히려는 입장. 요컨대, 이하 후유가 주장한 ‘일류동조론日琉同祖論’을 둘러싸고
“나는 기후 변화를 자본주의와 지구의 전쟁이라 말하지만, 이는 우리가 몰랐던 사실이 아니다. 이 전쟁은 벌써부터 진행되어 왔고, 지금 당장은 자본주의가 아주 쉽게 승리를 거두고 있다. 매번 경제 성장의 필요성을 내세워 기후 행동을 미루고 이미 합의한 온실가스 감축 약속을 깨뜨리면,
“지도 만들기map making와 근대 식민주의 간의 연관은 자주 언급되고 비판적으로 탐구되는데, 예를 들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사이의 여행보고서들 모음을 삽화집으로 만든 지도책들이 이 연구들에서 강조되었다. 프랑크 레스트린건트가 쓴 바와 같이, 이러한 모음집들에 있는 지도와 설화, 법적
“살 만한 삶에 대해 요구를 하는 것은 주어진 생명이 살아갈 힘을 갖도록, 지속적으로 살아나갈 힘이 있도록, 그리고 그 생명을 바랄 수 있는 힘을 가지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무엇이 삶을 살 만하도록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떤 조건하에서는, 예를 들어 가난,
매우 드문 경우지만, 자서전을 읽고 싶어 하는 이에게 루이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이매진, 2008)를 권할 때가 있는데, 그 이유의 하나는 한국어판 해설로 수록된 진태원의 감동적인 글 [이것은 하나의 자서전인가]를 알튀세르의 글과 꼭 같이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비애는 당신을 와해시키고, 상실이 굴절시키지 않은 일상으로부터 당신을 저 멀리 밀어 낸다. 이것이 바로 당신에게 비애를 해치고 나가라고, 비애를 더 잔잔하고 다루기 쉬운 슬픔으로 바꾸라고, 인생을 살아가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게 무엇이든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애착을 내려놓아라. 당신은
어떤 ‘노예 상태’ 그리고 ‘노예 상태’라는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방투쟁의 역사를 생각하게 하는 4권의 신간. 루시오 데 소우사•오카 미호코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 기록으로 남은 16세기 아시아 노예무역](신주현 옮김, 산지니, 2021), 혼다 소조 [미국 흑인의 역사: 진정한 해방을 향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