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가 올릴 슬기로운 X생활 팁은 다소 무겁지만 또 중요한 사항이니 꼭 정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달에 제가 거제도 비 피해 상황을 올리면서 첨부한 영상이 거제도가 아닌 것을 알게 되어 그 글을 삭제하고 사과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네이버에서 수익형 블로그 운영자는 1인 사업자라고
나는 강남 8학군에 산다.
결혼 후 쭉 외벌이다.
남편은 월급쟁이에서 프리랜서가 되었다.
좋은 주인 어르신 만나 신혼집에 쭉 산다.
애 둘, 강아지 한 마리 키운다.
초4, 고2 두 아이는 핸드폰이 여전히 없다.
두 아이는 학습 관련 학원이나 과외를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학교에서든
나의 외할아버지라는 사람은 동네에서 글 잘 쓰고 똑똑한 한량으로 제주도 해녀를 두번째 부인으로 데리고 와 나의 엄마와 세 아들을 낳았다. 딸은 공부를 시킬 필요가 없다며 국민학교 1학년도 가르치지 않고 집안일과 가장 노릇을 시켰다. 엄마는 어릴 적부터 세 남동생을 업어 키우고 나중에는
엄마는 해녀시고 아빠는 어부시지만
우리집 3남매는 수영을 못한다. 배멀미도 심하다.
두분 모두 남들보다 일찍 생계를 위해 자신의 일들을 시작했고 누구보다 그 무게가 무겁고 힘겨웠다. 자식들에게는 절대 물려주지 말자가 두분의 약속이었고 그걸 지키기위해 오빠를 아빠의 배에 태우지 않았고
바쁘신 부모님 덕분에 나와 여동생은 외할머니(이하 할머니) 손에 자랐다. 옛날 내 고향집은 부모님이 신혼살림을 차려 셋방살이를 하던 곳이라 오빠는 친가에서, 나와 여동생은 외가에서 지냈다. 무뚝뚝하고 낯가림 많은 나였지만 할머니와 지내는 시간만큼은 천상 아이가 되었다.
내가 국민학교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집에서 나와 유학생활을 했다. 고향집에서 내가 가게 된 고등학교와의 거리가 버스 편도 1시간 거리에, 버스는 하루 한두대 편성되어 있어 부모님의 지인댁에서 고등학교 3년 동안 하숙생활을 해야 했다.
중학교까지는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았어도 전교권을 차지하던 터라
엄마가 요양으로 가시고 아빠는 우울증이 온 것 같았다. 엄마를 더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엄마와 함께 이루어낸 그곳에서 더이상 엄마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허무함과 허탈감으로 무기력해지셨다. 날씨가 좋을 땐 홀로 배에 올라 종일 바다에 계시거나 밭농사에 매진하다가도 저녁이 되고
엄마와 늘 함께 하시던 밭일을 2년 전부터 묵묵히 홀로 해내시던 아빠는 오늘 처음 큰딸의 가족들과 함께 하시면서 연신 엄마를 그리워하셨다.
부부의 연이란 그런 건가 보다. 서로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것! 요양원에 계신 나의 엄마는 오늘도 아빠를 보시고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셨다.
지금 고2인 첫째는 여전히 폰이 없지만
학교생활에 큰 불편은 없었다.
중3 1학기, 고1 2학기, 고2 1학기 꾸준히 반 부회장으로 당선됐다.
아이의 공약 중 하나는 다음날 수업 일정과 과제, 준비물에 대해 반톡에 올리는 것이었다. 아이의 폰이 없다는 걸 담임 선생님 이하 반친구들이 모두 알았지만
오늘 아침 등교 준비 중인 고2 딸과 시덥잖은 대화를 주고 받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키도 작고 보잘 것 없던 시골 꼬마 여자아이가 어느새 커서 어른이 되고 두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나보다 커 버린 딸아이가 살갑게 나를 엄마로 부르는 것이 현실이 아닌 듯 잠시 낯설게 느껴졌다.
현실로 돌아왔을
@shianiory
끝까지 읽었습니다. 현실이 답답하시고 혈육의 말이 속상하실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또리콩이집사님은 스스로 잘 해 오셨고 지금도 잘 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잘 하실 것 같습니다. 속상한 마음은 이곳에 털어버리시고 그 자리에 자신감과 용기로 스스로의 마음을 자꾸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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