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어린이랑 싸우긴 싸우는 것 같은데 영 매가리가 없는 놈인가 보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오늘 종일 덤블링을 하고 죽도 두 그릇 밥도 두 그릇 국수도 두 그릇을 먹고 딸기 바나나 과자 요구르트 마이쮸를 쉼 없이 먹고 있기 때문에. 내가 바이러스라도 무서워서 오늘 밤 짐싸서 떠나야 할 듯.
'아기가 밤새도록 우는데 달래지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놔두고
화장실에 들어왔어'라고 울면서 전화왔던
친구
남편은 밤에 시끄럽다고 시댁 가서
지낸 지 3일째라 했다
아이와 단둘이 내몰려 있었던 친구..
누구든 이해하고 공감하고 함께해 줘야 하는데...
친구의 가족은 방관자였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냥 서글픈 슬픔이 몰려오는 날이 있고. 어린이에게는 오늘이 그런 날이었나 보다. 하원하며 오늘은 정말 지루하고 힘들었다는 말을 하더니 집에 돌아와 몇 차례 징징거리다 울기 시작했다. 이래도 울고 저래도 울더니 샤워를 하면서도 울고 저녁 밥상에 앉아서도 운다.
아이와 저 둘이서 메인과 사이드를 나눠 먹고 있었고 옆테이블 혼자 여행중이신것 같아서 사이드를 나누워 먹으려던 것 뿐인데 그런것 뿐인데!!!! 사이드는 안받으시고!!!!! 계산을 해주시고 가는게 어딨냐며 ㅠㅠㅠㅠㅠㅠㅠ저희 시장 두바퀴나 돌았어요…이모를 찾자~ 이모를 찾자 노래부르면서ㅋ
모두가 초코파이 한 상자를 함께 나눠 먹는 법을 배웠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으로 성별로 받아보기만 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것을 왜 똑같이 나누어 먹어야만 하는지를. 나눠 받지 못한 사람도 모를 것이다. 그것은 원래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뿐. 이야기 끗.
SNS에서 만나 많이 좋아했던 언니가 있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 한 번은 내가 피드에 초음파 사진으로 임신 소식을 알렸는데 그녀는 다른 계정으로 남의 자궁 속을 보는 게 역겹다는 글을 썼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그녀의 자궁 속 사진을 피드에서 보았다.
오랜친구를 만났는데 나의 이혼전에는 그렇게 만나 남편과 시댁의 불만을 말하더니 이혼 후에는 나의 남편은 이래서 좋고 착하다 이정도면 잘한다라고 두둔하며 나의 불행을 밑천삼아 자신의 행복을 과시하더라. 나는 너의 오랜 벗이였는데 나의 오랜 불행이 너에게 위안이 되었던 건지 묻고 싶었다.
어젯밤 어린이가 아빠랑 영상통화를 내 곁에서 하고 싶다고 했다. 전에도 설명을 몇 차례 해줬지만 나는 반복되는 상황에 불편하고 힘들고 조금 지쳐있었다. 그렇게 몇 번의 거절 의사를 밝히니 어린이의 대성통곡은 수순이었고 그러다 가래가 넘어가면서 저녁으로 먹은 간식을 모두 토해버렸다.
나 오늘 정말 힘들었는데 힘들었다 말할 곳이 없어 쓴다. 아빠가 보고 싶다고 서글피 풀 죽은 아이를 달래며 내 마음은 다 뭉개졌지만 울다 지친 아이를 재우고 일하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엄마는 울고 싶은데 울 수가 없어. 오늘 안에 끝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거든. 엄마는 엄마는…
그런데 가족은 달랐다. 결혼을 한 이후에도 내가 아닌 사위에게 한 상을 차려 대접하는 엄마를 보았다. 결국 그때도 나는 아니었다. 시댁에서는 김치에 밥이라도 먹으면 다행이었다. 거기서도 나는 아니었다. 나는 남자도 어른도 아닌 그냥 여자 사람이었기 때문에 영영 양보를 받긴 어려울 것 같았다.
육아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들이 우르르 들끓으면 대다수의 엄마들은 더욱 움츠러든다. 맘충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 더 애를 쓰고 자신을 검열한다. 유아차를 사용하는 것은 죄가 아니고, 육아를 하는 것은 사회의 일원을 키우는 가장 숭고한 일임을 계속 끊임없이 많이 이야기해야겠다.
그 친구와 나는 놀이터에 앉아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냥 평범한 여중생들의 대화였을 것이다. 하나는 팔을 들지 못하고 하나는 눈 한쪽이 눈동자로 보이지 않을 만큼 붉게 충혈되고 얼굴이 엉망이었지만 우린 그냥 아픔도 잊은 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서로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도 여지없이 팔 하나가 부러질 정도로 맞았는데 그러고는 밖으로 쫓겨났다. 아픈 게 익숙했던 터라 그냥 놀이터에 앉아서 그네를 타고 있었는데 멀리 얼굴을 아는 친구가 보였다. 그런데 조금 이상해 보여서 다가가 인사를 하는 순간 나는 이 친구도 맞고 쫓겨난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린이는 골똘히 생각하는 척을 하더니 해는 기쁨이고 비는 슬픔이고 바람은 화가 난 거라며 나는 자연이랑 똑같다는 대답을 해주었다. 감정은 모두 자연스러운 것임을 어린이는 알고 있었나 보다. 나는 이마를 탁 치며 더 큰 깨달음을 얻는다. 남은 시간은 하하호호깔깔 보낼 수 있겠다. 육아일기 끗.
차가 없었던 시절 나와 아이는 무적의 유아차 부대였는데 유아차로 전국 팔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대담했던 것이 새삼스럽다. 광화문에서 디럭스 혼자 들고 그 계단 다 올랐던 기억도 있고 출퇴근 9호선에서 유아차를 접어 두고 김포공항에서 고속터미널까지 아이를 안고 있었던 적도 있다.
다시 돌아와 용서를 빌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농기구의 머리를 톱을 잘라낸 뒤 그걸로 나를 때렸다. 결국 나는 정신을 잃은 채 병원으로 실려갔다. 몇 주 정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학교로 복귀했는데 그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그 친구도 병원에 있단다.
어린이와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다 보니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어린이의 목소리도 나의 목소리도 이전과 같이 돌아왔다. 엄마와 아빠를 아직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몇 번 더 이야기해주면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잠들기 전 사랑한다고 잘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생각을 되짚어 보니 참 오랜세월을 그렇게 보냈구나 싶었다. 깊은 관계가 싫다는 너에게 더이상 나의 깊음을 나누고 싶지 않아졌고 나는 더이상 너의 감정쓰레기통이 되지 않겠다 선언한다. 어쩌면 나의 이혼은 그동안 오래도록 나를 좀먹던 관계들과도 이혼인것 같다. 28년의 세월도 이렇게 덧없다.
우리가 자주 먹었던 간식이라곤 쥬시쿨 얼린거라던지 축구왕 슛돌이 과자라든지 어른들이 먹지 않는 간식들이었고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곶감도 깨강정도 초코파이도 모두 아빠를 위해 숨겼다. 나는 몰래몰래 찾아 먹던 그 간식들이 정말 맛있었다. 그러다 들키는 날엔 정말...(줄임)
이혼이던 사별이던 홀로된 여성의 외로움은 범죄의 타깃이 되기 쉽다. 외로움을 달래주겠다는 유혹에 제발 흔들리지 마세요. 우리는 유부남의 외로움을 달래줄 도구가 아닙니다. 돌싱남의 외로움을 채워줄 도구도 아닙니다. 도구로서의 삶을 끝내고 다시 도구이기를 자처하는 그 마음이 통탄스럽다.
그러던 ��느 날 나는친하게 지내던 동생네 집에 놀러 갔는데 식탁 위에 놓인 호랑이 시리얼 한 상자가 계속 눈에 띄었고 눈치를 챈 동생의 엄마가 나에게 시리얼을 한 그릇 말아 주었는데 나는 듣기만 했지 처음 맛보는 달콤한 시리얼 맛에 정신없이 앵콜을 외치며 한 상자를 거의 다 먹고 말았다.
대중교통은 교통약자를 위한 것이다. 멀쩡한 두 팔 두 다리로 운전이 가능하고 월급 따박따박 받으며 안정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타라 마라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했다면 본인이 자차를 타는 것이 맞다. 누구를 위한 권리인지도 모른 채 누리려는 도둑놈들이 많네. 이야기 끗.
어린이도 나도 감정을 다잡으려는 숨소리만 방안에 가득했다. 정적을 깬 어린이가 토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고는 내가 울어버렸다. 자책과 분노와 미안함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뒤엉켜 나를 바닥으로 찍어 누르는 듯했다. 나라는 사람은 복구가 가능한 것일까.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금쪽상담소에서 김윤아씨의 아버지가 목공소에서 매를 사이즈 별로 맞춰 사용하셨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 또한 그랬는데 다른 점이라 하면 그는 등산을 좋아했고 산에서 맷감으로 좋은 나무를 꺾어와 본인이 직접 깎아 열댓개의 회초리를 만들었고 작품을 만들었다며 스스로 감탄을 했다.
나의 강아지를 보낸지 곧 2년. 그동안 누군가의 강아지나 고양이를 만나도 귀엽다 예쁘다는 마음뿐 절대 만지거나 안지 않았다. 그런데 본디에서 고양이를 쓰다듬는 나의 캐릭터를 보며 그 이유를 오늘에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나 마지막으로 너를 쓰다듬었던 손길을 아직 기억하고 있구나.
이제 슬픔이 어디까지 내려갔니 물으니 한 뼘 정도 내려왔다고 했다. 그럼 우리 달려볼까? 했지만 당차게 거절당하고 집에 돌아가 티비를 보면 나아질 것 같다 하기에 얼른 데리고 들어왔다. 지금은 밥 먹으면서 엉덩이 탐정을 시청 중이다. 방구가 어린이를 웃겨주니 슬픔은 꽤 가신 것 같다.
침착하게 손으로 받아 침대는 살렸고 그대로 안아 화장실로 갔다. 바로전에 샤워하고 갈아입은 옷도 모두 벗겨 빨고 샤워도 다시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침착해라 침착해라를 마음으로 새기며 감정을 다스리려 노력했는데 돌아온 방에 지워지지 않은 냄새가 나의 트리거를 눌러버렸다.
나는 더 많은 분들이 유아차를 밀고 휠체어를 타며 세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물론 어렵고 고되고 순간순간이 도전처럼 느껴지겠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나아감을 느낄 수 있고 세상도 그 걸음에 조금은 발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모든 게 씻겨나가듯 위로를 받기도 하기에.
어린이가 처음 쌈짓돈으로 아이스아메리카노(나는 뜨거운 커피만 먹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늘 이렇게 말한다) 사주고 생일카드도 그려주고 까불지도 않고 종일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해주었다. 식사도 빠르게 미용실도 순순히 씻기도 혼자서.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없는 최고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