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년전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할머니랑 살았다.
나는 그때 월급 130만원 짜리 유치원 선생님.
원장에게 캐나다를 가고 싶어서 유치원 일이 끝나고 스타벅스에서 알바를 해도 되겠냐는 내 물음에,
원장은 대답대신. "이 선생네 그 정도로 가난하니?" 라고 물었다.
외국도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전 재산이 420만 원인 전부였던 남자.
남편에 대한 이야기다.
돈이 없는 사람.
가난한 남자.
그는 마이너스인 사람이었다.
20살 때 그를 만났다. 대학교에서.
웃는 게 예쁜 그 사람이 좋았다.
십 년을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다가 캐나다 반지하 집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나의 전 재산 $20불과
전 재산이 420만 원인 전부였던 남자.
남편에 대한 이야기다.
돈이 없는 사람.
가난한 남자.
그는 마이너스인 사람이었다.
20살 때 그를 만났다. 대학교에서.
웃는 게 예쁜 그 사람이 좋았다.
십 년을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다가 캐나다 반지하 집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나의 전 재산 $20불과
꼬마랑 한국말을 하고 있는데 하얀개 한마리가 우리 앞으로 왔다. 곧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따라왔다.
“혹시 너네 코리안이야? 우리 개도 한국에서 입양을 했거든. 얘는 코리안 말을 들으면 항상 이렇더라고.”
한국의 어디 개 농장에서 구조되어 왔다는 흰 개는 한국사람을 싫어할 법도 한데 나를
삶을 살 때 긍정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 있잖아. 정말 그렇다.
내가 캐나다 취업사기당하고 반지하에서 살 때,
주변 사람들한테 인사하고 웃어줬거든, 돈도 안 드는 거라 그냥 그것만 했어.
근데 우리 앞집 아저씨가 cbc 방송국 앵커였다. 나는 몰랐지. 나는 티비도 없었거든.그때
그 아저씨가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나의 아픈 이야기,
누가 볼까 무서워 일기장에도 ��지 못한 나의 어두운 이야기.
캐나다로 도망치듯 떠나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나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그래서 그 아프고 흉한 이야기들을 모두 한국에 버리고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잊고 싶고 없었던
외국에서 살고 싶었다.
대학교 때 호주에 다녀온 친구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돈이 없었다.
돈을 달라고 하면 엄마는 장난으로 말했다.
"엄마 팔아서 돈 달라고 해."
"엄마를 누가 사?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재미도 없는 엄마의 농담에 짜증을 냈다.
외국에서 살수 있을까? 나는 돈도
시댁에서 남편의 여권을 빼앗던 날. 인생이 이렇게 힘들어도 되냐고 생각했다.
어쩌자고 내 인생은 항상 이런 식이냐고 나는 다시 나를 원망했다.
시댁에서는 파혼을 요구했다. 캐나다로 떠나는 날, 나랑 아빠만 이민 가방을 짊어지고 인천공항에 갔다.
아빠랑 헤어지면서 울지는 않았다. 내
내 이야기를 궁금해 할 사람들이 있을까?
십여년전에 맞기 싫어서 한국에서 캐나다로 도망쳤어.
취업사기 당하고 뉴펀들랜드로 가니 돈 $20불 남더라.
반지하에서 살면서 영어 못해도 할수있는 일들은 다해봤어.
핸드폰도 안사고 악착같이 살았어.
취업시켜준다는 백인한테 성추행도 당하고 별별
안녕하세요. 캐나다 부자엄마입니다. 저를 팔로우 해주시는 분들이 4천명이나 되시네요. 👍
사는게 힘들어서 죽으려고 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살기로 마음을 먹던 날부터 죽을 마음으로 뭐든 했습니다.
세상일이 힘들다지만, 내가 나를 찌르는 것보다 힘든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삶이
캐나다에 도착을 하던 날, 돈을 보낸 유학원이 사기였다는 걸 알았다.
가족이며 남자친구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모든 걸 다 잃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캐나다에 남기로 결정했다.
끝까지 남아서 뭐라도 하다 보면 취업도 하고 돈도 벌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서웠고
분당에서 학교를 다녔다.
아빠가 다니던 대기업을 관두고 나서 용인으로 이사를 갔다.
용인 집에서 분당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우리 반은 모두 분당에 사는 애들이었다. 용인 사는 나는 그 속에서 이방인이었다.
항상 나만 보면 놀려대는 남자애는 내가 문을 열면 소똥 냄새가 난다느니
각자의 속도가 있다는 부아 c의 말을 좋아한다.
턱걸이로 들어간 지방 4년대는 2년도 채우지 못하고 자퇴했다.
첫 월급은 95만 원이었다.
영구 임대 아파트에서 살았다.
친구들이 결혼하고 승진할 때 캐나다로 왔다.
내 나이 29 이었다.
반지하에 2년 넘게 살았다. 올라갈 일만 있다고
17 년전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할머니랑 살았다.
나는 그때 월급 130만원 짜리 유치원 선생님.
원장에게 캐나다를 가고 싶어서 유치원 일이 끝나고 스타벅스에서 알바를 해도 되겠냐는 내 물음에,
원장은 대답대신. "이 선생네 그 정도로 가난하니?" 라고 물었다.
외국도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캐나다에서 취업사기당하고 $20불 남았어. 편하게 2만 원이라고 할게.
2만 원에서 1억 모으기까지 4년이 걸렸었거든.
초반에는 나 혼자 모으다가 전 남자친구,(현 남편) 같이 모았지.
영어도 안되고 영주권도 없으니까 남들이 안 하는 일 했어. 하루 종일 벽만 보고 설거지 하고 접시 나르고
캐나다 호텔에서 일할때는 한국분들을 참 많이 만났다.
신혼부부였을까? 남자는 얼굴이 벌게져서 주문대 앞에 섰다.
한국말을 하면 싫어할까 싶어 고민하다 내가 말을 건냈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우와 한국분이셨구나, 저희가 신혼여행으로 캐나다에 왔어요."
귀엽고 예쁜 커플에게 호텔 주변